뉴욕에 오기 전부터 추천받은 극으로, 설명이 필요없을만큼 유명작 - 이탈로 칼비노에 따르면 오히려 설명이 필요한 작 - 이지만 나는 오늘 처음 봤다.
Arthur Miller는, 대학교 때 김성호 교수님을 통해 “Arthur Miller 몰라요? 정말 몰라요?” 이렇게 무시 당하며 소개 받고 “The Crucible”을 세종문화회관에서 봤던게 .. 와 벌써 10년 전이구나.
몇가지 새로 알게된 사실 - Arthur Miller가 2005년에 작고했다는 것, 그리고 2012년 현재 공연이 브로드웨이에서 네 번째 공연이라는 것. 정말 흔치 않은 기회고 감사히 20만원을 갖다 바쳤다.
다만 나는 1막을 보고 뛰쳐나왔다. 자아는 강한데 성정은 연약한 남자들, 게다가 부자지간이 열등감을 뿜어내며 빚는 갈등과 비극은 이미 친구들 친척들 사회생활 속에서 충분히 접하고 있는데 그걸 또 극으로 보고 있기가 너무 피곤했다.
다만, 이 작품을 1막이라도 보게 되어서 내가 못참던 인간들에 대한 예의를 조금은 갖추게 되지 않을까 싶다.
내가 부모님과 친해진 것은 사춘기를 겪으면서 부터인데, 진지하고 철학적인 부모님의 삶의 방식과 내가 그제사 좀 통하기 시작했다.
우리 아빠는 대개의 우리 세대 아빠들이 그런 것처럼 아주 가나난 집에서 자랐고, 어릴 때부터 가장 노릇을 하느라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한다. (너무 전형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아빠가 정말 특이한 점은, 물질적이거나 현실적인데 별로 욕심이 없다는 거다.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를 아낀다. 뭔가를 꼭 가져야하고 주류에 꼭 포함되어야 한다는 FOMO (fear of missing out)가 전무하다. 아빠 직업 상 그런 삶이 허용되기 때문에 다행이라 하겠다. 학교라는 공간을 떠나서 회사에 입사하고 소위 잘나가는 직장 상사들과 부대끼면서 우리 아빠가 얼마나 순수하게 사는 지 알게 됐다. 그래서 대개는 좋지만 좀 답답할 때가 없는 건 아니다.
커서 알게된 아빠의 또 다른 특징 두 가지는 1) 남녀간의 사랑에 대해 아주아주 진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 2) 자신이 가진 패를 언제나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즐긴다는 점이다. #1번은 내가 연애를 시작하면서부터 알게 됐는데 글로 쓸 수는 없지만 놀란 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ㅎㅎ
우리 엄마는 나를 형성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는데, 아빠처럼 관조적이기 보다는 훨씬 적극적이다. 스케일이 아주 크고 몰빵을 좋아한다.
엄마가 언니와 나를 교육하는 데 있어 가장 중점을 둔 점은, 세상의 모든 목표에는 대안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경쟁적인 한국 교육 환경에서 부모님이 이런 생각을 갖고 나를 본다는 것이 오히려 내 목표를 향해 힘껏 달려가는 데 정말 큰 힘이 되었던 것 같다. A를 못 이루더라도 B,C,D를 하면서 세상을 즐겁게 살 수 있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셨는데, 우리 외할머니가 Tiger Mom이셔서 엄마가 아주 질렸다는 데 그 배경이 있는 것 같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엄마에게 조언을 구하자 두가지를 꼽으셨다. “성공이 하고 싶으면 사람에게 드는 돈을 아끼려고 하면 안된다”는 것과 “덕을 쌓으려면 남의 행복에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또 우리 엄마 답게 “그게 니가 하고 싶다고 되는게 아니라 니 그릇에 달린 거니 그런 줄 알라고..”라고 맺으셨던 기억이 난다.
시집도 안가고 동남아로 뉴욕으로 떠돌아만 다니는 딸을 조급한 마음 없이 긍정적으로 바라보시는 부모님이 계셔서 결핍 두려움 불안 없이 하루하루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너무 사랑하고 보고싶다.
뉴욕에 간다고 했을 때 성훈 선배께서 “네가 100살이 되어도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한 번 찾아다녀 보렴”이라고 조언해 주셨다.
100살이 되어도 하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하고 싶은게 하나 있긴 하다. 물질적으로는 조금 촌스러워도 정신적 사치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공간을 운영하고프다. 문학, 역사, 철학, 신화, 예술이 이야기되고 흐르는 곳. 인터넷 공간으로 말하자면 이 텀블러 같은 공간이고, 오프라인 공간으로 들자면 뉴욕에서는 바로 Housing Works Bookstore Cafe, 북경 산리툰의 Bookworm Beijing, 부산의 인디고 서원 같은 곳이 되지 않을까 싶다.
뉴욕이라는 문화의 집결지답게 Housing Works Bookstore Cafe에서는 매일 문학 이벤트가 있고, 오늘은 시낭송이 있다고 해서 퇴근하고 엄청 귀찮았지만 선배의 조언을 곱씹으며 갔는데 역시나 너무 잘한 일이다.
우선, 참석자들의 표정에 하나같이 문학 역사 철학을 좋아하는 사람들임이 드러나 있었다. 그냥 그런 사람들이 가득한 곳에는 별로 네트워킹을 안해도 푸근하다.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 할아버지부터 NYU 다닐 것 같은 허름한 차림의 학생들이 한가득한 공간이 좋았다.
시는 영어라서 잘 알아듣지 못했지만 다들 풍부한 감정으로 낭독하고 개성있게 차려입은 모습도 좋았다. 그리고 역시나 Philp Levine 할아버지는 84세의 나이에도 가득한 유머와 위트로 청중을 사로잡았다. 멋지다.
마지막으로 오늘 온 시인들만 그런 지는 잘 모르겠지만 멋진 예술가들은 폴 오스터부터 시작해서 다들 부룩클린에 사나보다.

by Philip Levine
Cuban Spanish is incomprehensible even to Cubans. “If you spit in his face he’ll tell you it’s raining,” the cab driver said. In Cuban it means, “Your cigar is from Tampa.” Single, desperate, almost forty, my ex-wife told the Cuban doctor she’d give a million dollars for a perfect pair of tits. “God hates a coward,” he said & directed her to an orthopedic shoe store where everything smelled like iodine. A full-page ad on the back of Nueva Prensa Cubana clearly read “Free rum 24 hours a day & more on weekends.” (“Free rum” was in italics.) When I showed up that evening at the right address, Calle Obispo, 28, the little merchant I spoke to said, “Rum? This is not a distillery.” They were flogging Venetian blue umbrellas for $4 American. Mine was made in Taiwan and when it rained refused to open. Before sunset the streets filled with music. In the great Plaza de la Revolución the dark came slowly, filled with the perfume of automobile exhaust and wisteria. I danced with a girl from Santiago de Cuba. Gabriela Mistral García was her name; she was taller than I & wore her black hair in a wiry tangle. She was a year from her doctorate in Critical Theory. After our dance she grabbed me powerfully by the shoulders as a commandante in a movie might, leaned down as though to kiss me on the cheek, & whispered in my good ear, “I dream of tenure.” It was the Fifties all over again.
싱가폴에서 일한 경험에 더불어 구글에서의 지난 4년이란 세월 덕분에 뉴욕에서의 직장생활이 (아직은) 죽도록 어렵지만은 않다. 일에 흥미를 가지고 성실하게 일하는 것은 개인적 동기에 기인하는 거니까 뉴욕이라서 힘들거나 쉬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신 뉴욕에 와서 오랜 지인들과 재회하면서 느끼는 바가 많다.
하나는, 사람이 참 안변하는 건 맞지만 그게 긍정적으로 발현되기도 혹은 부정적으로 변질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잘 늙는다는게 무엇일까. 까칠하고 명석하던 사람이 여전히 명석하지만 여유를 갖게 되는 아름다운 모습, 반대로 예리한 통찰력으로 월가에서 명성을 날리던 사람이 그 재주는 더 이상 젊을 때 같지 않고 다만 돈 벌고 남이 얼마 버는데 집중해 버리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이 감동적이기도 실망스럽기도 한 모습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게 한다.
둘째는, 내가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는 온전히 내가 어떤 사람이냐에 달린 거라는 걸 다시금 생각하게 해 준다. 동행하는 배우자나 연인을 만났을 때 그 사람에 대해 훨씬 더 잘 알게 한다. 어떤 배우자를 선택하느냐는 자신의 성장기에 대한 결정체가 아닐까. 나는 나라는 사람의 결정체를 잘 표현하는 사람과 만나고 있지 않은 것 같아서 마음이 무겁다.
솔직히, 미국와서 이렇게 생각하게 될 줄 알았다.
마지막으로 미국회사를 다니면서 나도 아주 나쁜 버릇이 들었는데 정말이지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 쓰는 것이 도가 지나치다. 영어를 아름답게 사용하는 것에 대한 한계는 이미 타협했고, 갈수록 국어를 잘 하는 사람이 멋진 것 같다. 우리말을 바르고 아름답게 쓰는 사람으로 늙어가고 싶다.
1. 일요일마다 5km씩 달리고 있다. 작년 말 꿈타장의 유혹하는 책읽기 podcast에서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에피소드를 들으며 새해 다짐으로 삼은 거다. 마침 Run 5k라는 app이 있어서 아주 알차게 활용 중인데다, 지난 1월 뉴욕에서 사온 러닝화가 아주 요긴하게 쓰이고 있다. 상반기가 끝날때 쯤 되면 5km는 너끈히 달릴 수 있을 것 같고, 하반기에는 run 10k app으로 갈아탈 예정이다.
고작 5km이지만 뭔가 달리고 나면 원시의 나로 돌아간 기분이고, 신림동 도림천과 어우러진 산동네 모습이 아름답게 담기는 것도 너무 좋다. “물고기는 헤엄치고, 새는 날고, 인간은 달린다”고 하지 않는가. 특히나 별로 할 줄 아는 것, 돈과 시간이 모두 없는 지식노동자에게 정말 좋은 운동인 것 같다.
2. 식탁 위의 논어 - 지난 추석부터 거의 안빠지고 매주 1시간씩 녹음하던 것이 이제 다음주면 끝이 난다. 30주를 쉬지 않고 달렸고, 나름 우리 가족의 주말 priority가 되었다. 라디오 피디가 어릴적부터 꿈이었던 나에게 팟캐스트를 운영하는 좋은 경험이 되기도 했지만, 우선 어른이 되고 부모님과 제대로 대화할 수 있는 좋은 소재였던 것 같다. 대개 나는 금요일 늦게까지 놀고, 토요일에 하루 종일 자고, 토요일 밤과 일요일 저녁에 데이트를 하거나 친구를 만나는 주말 스케쥴로 부모님과 제대로 대화할 기회가 거의 없었던 것을 제대로 turn around했고, 너무 미리 생각하는게 아닌가 싶지만 나이 들어서 부모님이 그리울 때 팟캐스트를 들으면 되겠구나.. 라는 생각을 안한게 아니다.
논어가 끝나고 나서도 계속 팟캐스트 운영을 하고 싶다. 지금 제일 하고 싶은건, 갈릴레오의 손가락이라는 책이다.
3. 미사 - 요즘 역삼성당의 수요 미사를 나가기 시작했다. 중 2때까지는 주일 미사에 참 열심히 나갔었는데, 중3부터 성당에 발을 끊었다. 서른쯤 되고나니까 다시 누군가가 나에게 회개하고 반성하고 착하게 살라고 잔소리하는게 마음으로 와닿고 고맙고 그렇다.
지난 2년간은 한달에 두세번씩 비행기를 탔다.
불행히도 이러한 상황에 걸맞지 않게 나는 비행기가 조금만 흔들려도 괴롭다. 그 불안의 터널을 지나갈 때마다 드는 생각 두가지.
하나는, 이렇게 죽어도 부끄러울 일은 만들지 말자. 이렇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를 돌아보면, 잔머리 굴리고 나 좋자고 남에게 피해주고 그러기에 인생이 참 아깝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매사 진실되게 살고 만나는 사람마다 성심을 다하고 싶다.
둘째는, 생각나는 사람들 보고싶은 사람들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표현하면서 살아야겠다는 것. 일단 내가 지금 이 순간 그 사람이 생각나고, 보고싶고, 좋아한다는 것이 영원하지 않을 확률이 높고, 또 그걸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
문득 돌아보니 구글에 다닌지 만 4년이 됐다.
정말 많은 이유로 여러번의 “관둘까” moments가 있었지만 여기까지 온 스스로가 부끄럽지만 좀 대견하다. 4년이 나에게 별 게 아닌 이유는, 전 직장을 3년 다니고 옮길 때 모 상무님이 “너 인제 매 3년마다 회사 옮겨다닌다”고 귀엽게 저주해주셨고, 내가 그걸 깼다는게 중요하다. ^^
4년이 된 김에 초심을 돌아보면, 2005년 얼떨결에 졸업과 동시에 취직을 했고, 이듬해가 돼서야 뭔가 내가 일하고 싶은 곳에 대해 생각해 봤던 것 같다. 막연히, 불가능할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뭔가 엄청 기발한 것을 만들어내는 [픽사]나 [구글]같은 회사를 갔으면 좋겠다고 꿈 꿔왔다.
그런데 그 구글에 어찌어찌 입사를 해서 유학, 사회적 기업, 스카우트, 벤처 등의 다양한 유혹과 고민을 뒤로하고 남아있는 것이 현재는 아주 즐거운 사실이다.
처음에 가장 놀랐던 건은, 입사하자마자 어떤 분의 부고가 떠서 모르는 분이라 많이는 아니지만 소정의 현금을 봉투에 넣어 부고를 공지한 인사팀에 가져갔더니, 인사팀장께서 “아, 여기서는 안 이러셔도 됩니다”라고 나를 돌려보내셨을 때였다. 한 팀에 200여명이 있어도 그 팀원의 경조사를 작게 크게 모두 챙기는 문화에서… 정말로 깜짝 놀랐었다.
가장 좋았던 것은, 주위사람 눈치를 보지 않고 그냥 stretch해서 열심히 일할 수 있고, 그만큼 열심히 기량을 발휘해서 일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짐은 입사해서 지금까지 한결같이 최고일 따름이다.
그렇게 처음 1년 반을 한국의 외국계회사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생리와 구글이라는 21세기형 회사에 대한 잘못된 기대치로 인해 회사에 적응하지 못하고 내적으로 고생이 많았고, 그러고는 싱가폴로 옮겨서 경험해보지 못한 범 영국계 (구 식민지 포함) 사람들 및 동남아 문화와 맞닥드리면서 역시 엄청 허덕였다.
다행인 것은 그런 와중에도 나도 회사도 끊임없이 고민하고 또 도전해오고 있다는 점, 그리고 회사 역시 내가 좀 더 익숙한 방향으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구글와서 여러가지로 많은 덕을 봤지만, 주변 사람에게 회사에서 점심 대접하고 광을 팔 수 있다는 게 참 좋았던 것 같다. 두번째 부터야 다르겠지만, 대개는 “구글에 식사하러 오세요”라고 하면 즐겁게 친히 방문해 주셔서 사람도 더 많이 만날 수 있었고, 방문하는 수고는 오신 분이 해주셨는데도 감사 인사를 받으니 이 점은 회사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다음 마일스톤을 고민하며.